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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창조는 누구의 권리인가

체리사탕 2011. 3. 5. 07:58

지난 2월22일, 서울역 인근 저작권교육원에서 개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저작권 정책 분야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에 참석하는 정책 고객은 나를 포함해 모두 22명이었다. 대부분 정책 고객의 소속이 이런저런 산업 협회의 장이었다. 나는 고려대학교 학부 재학생이다. 나 같은 학생이 뭔가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분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내가 활동해온 부분은 있다. 그 동안 점점 더 디지털화되어 가는 사회에 이용자가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해왔다. 외부 필진으로 블로터닷넷에 100편 넘는 글을 썼다. 소셜웹의 시대적 변화를 이윤 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 사회적 발전의 측면에서 분석했다. 지난해 4월에는 ‘소셜 웹이다’라는 책을 써서 종이책으로 출간했고, 7월에 전자책으로 웹에서 무료 배포했다. 인터넷에 공공지식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2007년과 2008년에는 MIT 오픈코스웨어(공개강의운동)의 국내 정착을 위해 뛰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 상반기에는 세계화와 빈곤문제에 관련된 NGO에서 일하면서 네티즌의 온라인 협업으로 공공지식을 확대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지식의 공유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흐름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믿고 행동해온 이 모든 것들이 그 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많은 중요한 분들에게 어떻게 인식될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이 중심으로 보는 이윤과 내가 핵심으로 보는 가치는 다른 기준이기 때문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이 달랐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내 차례가 오기까지는 1시간이 거의 소비됐다. 안산 경일고 조경희 교사, 디지털 자유 문화의 표준을 마련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의 정진섭 대표, 오픈액세스에 관여하고 있는 최희윤 KISTI 정보유통본부장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저작권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본인이 속한 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관련 저작권을 보호해달라는 논지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관련된 법규, 정책, 기술의 강화였다. 귀 담아 들을 부분도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도중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미래,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부분은 마음이 걸렸다.

그곳에 앉아 계신 어른들이 보기에 우리 아이들의 문제는 그들이 저작권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있어도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저작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창작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 등을 한다는 얘기였다. 심지어는 양심을 문제삼을 만큼 그들이 잔인하고 무도하게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이 저작권 침해를 안 하게 막는 방법은, 그래서 그들의 양심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이들이 저작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면 반드시 잡고, 잡으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잡히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의식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략 이러한 이야기였다.

그 자리에 앉아 계신 어른들이 보기에 학생인, 그래서 좀 더 큰 아이일 뿐인 나 역시 그 우리 아이들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에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반론은 감히 그 자리에서는 입밖에 내지 못했다. 그것은 왜 우리 아이들이 갑자기 저작권을 위반하냐는 부분이었다. 정책 자료에도 분명히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저작권 위반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 중에 일반 이용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 일반 이용자 중에는 우리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아이들이 갑자기 양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제는 아이들의 양심이 아니다. 갑자기 아이들의 양심이 나빠진 것이 아니다. 급격히 바뀐 것은 ‘기술’이다. 기술의 속도가 법과 제도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빨리 발전하고 있는 탓이다. 법과 제도는 그 때 그 곳에 앉아 계신 많은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 더 높으신 분들의 이해관계와 걸려 있다. 그래서 잘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기술은 상상력과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상상력을 통해 더 빨리 움직이고, 이윤을 통해 더 빨리 움직여야만 하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 그 둘의 차이가 이러한 사태를 일으켰다.

아이들은 단지 그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죄가 있다면 그들이 창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그 디지털 기술을 쓰지 않았다. 법전에, 교과서에 쓰인 대로가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는대로, 원하는대로, 서로에게 더 많은 가치를 줄 수 있는대로 썼다.

사실 그것이 디지털이 진화해온 방식이었다. 1969년에 탄생한 인터넷의 꿈은 분산형 네트워크였다. 그것은 인터넷의 간대간 연결의 원칙(end-to-end principle)이라는 네트워크 디자인에 잘 드러난다. 그 디자인은 혁신은 중앙이 아니라 끝에 있다는 원칙이었다. 네트워크를 진화시키는 힘을 네트워크의 단말기, 개인용 컴퓨터(PC)에 준다는 기준이었다. 이 개인용 컴퓨터는 일반적 목적을 가진 기계(general purpose machine)였다. 개인용 컴퓨터는 계산기의 연장이 아니었다. 계산기는 계산기로서 기능할 뿐이지만, 컴퓨터는 그 어떤 것으로든 기능할 수 있다. 그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창의성이다. 기계가 인간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터넷이었다.

인터넷이 변화이고 혁명인 까닭은 그것이 오늘날처럼 널리 쓰여서도, 야후부터 구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탄생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새로 쓴 사건이어서 위대하다. 인간의 창의성이 기계를 움직이고, 그것이 네트워크를 통해 전지구로 확산된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것이 디지털이고, 소셜웹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죄였다.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아날로그의 법과 질서가 아직 그 만큼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곳에 앉아 계신 회장님들, 대표님들에 비해 업계 경험도 일천하고 지식도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존 산업과 디지털 이용자간 상생의 길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용자를 배제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열쇠는 업계도, 정부도 아니고 이용자들이 쥐고 있다. 이용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저작권 타협안이란 결국은 쥐와 고양이의 게임을 지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법은 추적하지만 이용자는 도망간다. 그 결과는 더 많은 범죄자, 더 높은 행정 비용, 더 비싼 보안기술 뿐이다.

해결책은 이용자에게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키워주는 저작권 교육은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됐다. 그들에게 먼저 권리자로서의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핵심이고 선행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자신의 권리 의식을 바탕으로 타인의 권리 의식을 존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자기 권리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는가. 선거도 할 수 없고 복지 혜택도 주지 않으면서 세금은 더 많이 내라고 한다면 어느 국민이 좋아하겠는가. 그것이 저작권이 현재 우리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일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꿀 때가 됐다. 아이들의 권리를 우선시한 저작권 교육이, 홍보가 필요하다. 창작자의 권리는 이제 시민의 권리다.

사실 이와 같은 불법 다운로드 문제를 제외하면 우리 아이들이 재산권 문제로 시빗거리가 될 일이 거의 없다. 아이들은 땅도, 집도, 혹은 어떤 버젓한 소유물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저작권에서는 문제가 되는 까닭은 정치, 경제와 문화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 영역에서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화를 소비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이 공유하고, 나아가 창조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법과 제도와 충돌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보면 시대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다. 저작권 권리자가 각 콘텐츠 제공 산업의 회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된 현실을 뜻한다. 따라서 이제 그 현실에 맞게 저작권에 대한 인식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 저작권에 상표권, 특허권 등을 포함시킨 소위 지적 재산권은 달리 표현하면, 문화에 대한 권리다. 문화에 대한 소유권을 말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 문화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권리 역시 지켜주고 키워줘야 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가 창작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자기가 콘텐츠를 만들고, 그것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나누고, 상호 평가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더 필요한 것이 남아 있다. 아이들에게 앞으로 열린 사회를 열린 디지털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인터넷은 아이들이 창작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 한국어 온라인 콘텐츠는 취약하다 못해 빈곤하다. 더구나 상업적 콘텐츠는 철저히 저작권으로 보호된다. 그 보호는 더 강화되어 이용자 순수생산 콘텐츠(UGC)로 재생산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좁다. 학계에서 논문을 인용하는 것처럼, 대중문화의 콘텐츠는 아이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창의성을 발휘하기에 좋은 콘텐츠다. 그러나 팬픽션이든, 상업 동영상에 자막을 달든, 그와 유사한 행위가 허가되지 않은 원저작물에 대한 2차 저작물 제작 행위로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 대부분의 공공 정보는 아직도 밀실에 잠들어 있다. 대학, 정부기관 등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정보가 있는 곳들은 많다. 그러나 지식의 공유가 아직 그들의 사회적 책임이 아닌 이상 그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보다 실질적인 저작권 교육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권리자로서 일깨우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디지털 기기를 구매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이 이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문화에 참여할 여지도, 창조할 부분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누구의 양심이 더 문제인가.

창의성이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 인터넷이 열렸다. 그 인터넷이 인프라가 되고 있다. 비트와 원자가 하나되고, 인간과 웹이 하나되는 소셜웹 시대가 왔다. 창의성이 폭발하는 창의성의 혁명이 올 수 있다. 그 주역은 이용자가 될 것이다. 소셜미디어란 다름아닌, 이용자가 곧 미디어인 시대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 이용자의 핵심층이 곧 우리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한국에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가 태어나기 어려운 많은 이유 중 하나와 같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이 만들어가는 문화와 미래의 권리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다. 도시의 수호자이지만 범법자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크나이트다. 시대의 주역이지만, 그들은 변화를 변화라고, 창조를 창조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이 디지털 시대에, 창조는 누구의 권리인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떠한 미래를 어떻게 열어줘야 하나. 그 문제의 해답은 적어도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고민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리는 이 문화는 특정 산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