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7일 뉴욕타임즈는 ‘일본 청년들 세대의 벽에 막히다’(In Japan, Young Face Generational Roadloacks)라는 기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일본의 이야기를 전했다. 소니, 도요타, 혼다는 오늘날의 구글, 애플과 마찬가지로 창업자들이 20대에 시작한 기업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기업들은 침묵하고 있다. 소니, 도요타, 혼다를 이어갈 다음 세대의 일본 기업은 어디에 있는가?
기사는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원인으로 ‘세대의 벽’을 꼽았다. 일본 사회는 점점 더 고령화되고, 고령화된 인구는 점점 더 보수화하고 있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젊은 인구가 사회의 의사 결정층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 좋은 예가 케니치 호리에의 사례다. 30대 초반인 그는 바이오연료 시스템을 만드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주변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비슷한 또래의 많은 일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다 못한 그는 2년 전에 대만으로 옮겼다. 중국어를 배워서 그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그러나 켄이치가 중국으로 옮겨간 것도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중국 역시 세대간의 벽이 높아지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 자녀 출산’ 운동 때문에 역사상 최대의 노령 인구 비율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과다 생산된 남성들은 짝을 찾지못해 불가피한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보여 상황은 더 위태롭다. 인구 대국이 고령 대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MIT 슬론경영대학원의 황야성 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에서 ‘정부 주도의 중국 경제는 중국판 다국적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기업보다는 정부와 이해 관계가 맞물리는 기업의 발전을 선호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본의 흐름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1979년부터 1989년까지는 창업과 그 기업의 고용, 발전이 경제 성장을 견인한 반면 1989년이후 부터는 정부의 공공 투자와 정부의 후원을 받는 과점 내지 독점 기업들이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다. 인구의 고령화와 함께 이 왜곡된 시장 질서는 중국 경제의 그늘을 더 짙게 만든다.
고령화 문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도 세대간 갈등과 그로 인해 사회 발전이 저해되는 양상은 이미 뚜렷하다. 삼성, 현대, LG 같은 대기업은 더 이상 새로 나올수 없는 분위기다. NHN, 엔씨소프트 등 포털과 게임 업체를 제외하고는 대기업의 반열에 들만한 새로운 기업을 전혀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은 일본, 중국,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국과 같이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통해서 젊은 인구를 수혈할 수 있는 나라를 제외하고는(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왔고, 인텔을 이끌었던 앤디 그로브는 헝가리계,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계다.) 많은 선진국, 개발도상국들이 비슷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
인구가 오히려 자산인 나라들은, 폭발하는 젊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빈곤 등 과제들을 안고 있지만 이 나라들은 희망을 안고 있다. 살코위츠는 1977년에서 1997년까지 21년간 출생한 젊은 세대를 ‘디지털 밀레니엄 세대 플러스 넷 세대’라고 정의했는데, 약 8천110만 명의 이 세대 상당수가 바로 이 지역 ‘영월드’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첫째, 제3세계에 정보통신 인프라가 확대되고 있다. 세계 최빈 지역 중 하나인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에서 2000년 인터넷 이용률은 인구 100명당 0.5명이었다. 7년이 지난 2007년, 그 비율은 인구 100명당 4명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물론, 전체적인 비율을 놓고 보면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는 현저히 낮다. 그리고 여전히 터무니없이 높은 인터넷 사용료 등 가격 장벽도 높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최근 SAT-3 광케이블이 도입됐다. 2009년에는 10만 피트 상공에 열기구 풍선을 띄워 이에 기반한 준궤도 무선네트워크를 서아프리카 지역에 공급하는 서비스가 상품화했다. 희망은 있고, 상황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둘째, 정보통신 인프라가 그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준다.
인도 방갈로르의 수하스 고피나스가 좋은 예다.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문제아였고, 부모의 골치 덩어리였다. 공부보다는 인터넷 카페에서 인터넷만 했다. 부모의 꾸지람에 그는 이렇게 반박하곤 했다. 언젠가는 자신이 빌 게이츠처럼 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당시 14세였던 수하스는 이미 글로벌 비즈니스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가 인터넷 카페에서 인터넷을 하는 것은 채팅이나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회사들의 웹 사이트 구축을 돕는 ‘알바’를 하고 있었다. 수하스의 재능은 그가 집처럼 살았던 인터넷 카페 주인이 알아봤다. 그는 수하스에게 프리랜서 개발자의 길을 권했다. 수하스는 초기 시행착오 끝에 중소기업 상대로 그의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글로벌스(Glovals)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회사를 전세계 12개 나라에 120여 명의 직원을 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그는 2008년에 ‘2008년을 빛낸 젊은 기업가’로 선정이 되어 그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했다.
그리고 지금 ‘영월드’에는 수많은 수하스가 있다. 가나의 더소프트트라이브(theSOFTtribe), 아르헨티나의 글로반트(Globant), 인도의 인포시스(Infosys) 같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중견기업들이 그 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많은 기업들이 싹을 트고 있다. 그곳에는 아주 넉넉한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고한 경영학자 C. K. 프라할라드가 그의 역저 <저소득층에 투자하라>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의 숫자가 너무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 그들의 구매력이 모이면 그것이 아무리 작을 지라도 40억이다. 그 임팩트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이번 아랍 혁명을 통해서 이들 ‘영월드’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그들의 기업가 정신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식 역시 남다름을 보여준다. 중동의 구글 임원인 웨일 고님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집트 사회의 변화를 위해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초기 시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결국, 그는 이집트 정부에 의해 일정 기간 구금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미국인 아내를 맞아 다국적 기업의 임원으로 살고 있는, 그가 스스로 자처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에서 이들에게 돈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진정 세상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가? 우리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앞길은 어떠한가?
그것을 생각해보려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왜 저개발국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기업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왜, 그들이 사회 변화의 주동 세력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왜 저개발국의 성장하는 정보통신 인프라가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네이티브’에 있다. ‘존재하는 것은 검색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검색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차이다. 자라면서 컴퓨터를 접하고, 말하면서 인터넷을 배운 그들에게는 코드를 통해 전에 열리지 않던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은 꿈이 아니다. 영국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의 한 구절이 이들을 잘 설명해준다.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이 꿈이 아니다.’
이같은 디지털 네이티브는 과거 정부 주도로 훌륭한 인터넷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글로벌 기업의 ‘기업가’이고 사회적 변화의 ‘혁명가’인가? 아니면 게임 ‘중독자’이고 불법 ‘복제자’인가. 정체성의 차이는 커 보이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그 만큼 가까운 것도 없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의 존 폴프리와 우루스 가서는 그들이 공저한 <그들이 위험하다>에서 이 디지털 네이티브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혁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법과 질서에 구속이 되지 않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냅스터의 숀패닝에서부터 페이스북의 마크 쥬커버그까지를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냅스터는 불법 복제로 세상의 논란이 되기 전에 쥬커버그와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웹 사이트였다. 단지, 그의 문제는 기존 산업의 기득권인 저작권의 영역에서 신화의 첫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페이스북도 개인정보 침해라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존 산업과 이해 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숫자는 많지만, 이해 관계의 응집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훨씬 떨어지는 이용자간의 관계에서의 문제다. 불법복제와 소셜 미디어간의 벽은 도망자와 황제의 벽만큼이나 높아 보이지만, 이처럼 실상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기업가 혹은 게임 중독자, 혁명가 혹은 불법 복제자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우리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기존 산업의 이해 관계와 어른들의 입시에 따른 염려를 제외하고 그들을 본다면, 그들에게는 얼마만한 잠재력이 있는 것일까. 2009년에 ‘서울버스’로 대박을 터뜨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유수완은 단지 그 혼자만의 사례일까, 아니면 그 세대의 잠재력을 드러낸 것 걸까? 유수완을 싹이라 보고 그 싹이 더 크게 자랄 힘이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
결론은 생태계다. 우리에게 디지털 네이티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딘가에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마크 쥬커버그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씨앗과 싹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인터넷 시장에서 끊임없이 승자가 바뀌는 것도 그 시장이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후가 구글로, 구글이 페이스북으로, 페이스북이 내일의 누군가로 바뀔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똑같은 조건 ‘개방적이고, 분산적이며, 중립적인’ 인터넷이라는 기본적인 유통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환경이 주어져 있는가? 우리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삶의 조건이 ‘개방적이고, 분산적이고, 중립적인가.’
단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들의 양면 중에, 그들의 두 잠재적 가능성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그 관심과 기대에 부응해 성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가 그들의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에 기대를 걸어야 할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늘 아이들을 걱정하지만, 사실 우리 어른들이 관습과 제도에 적응하면서 잃어가고 있는 창의성의 주인공들이 바로 아이들이다. 유치원에서는 아무도 창의적인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때로는 그 창의성 때문에 질서를 잃어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간섭해야 할 때는 그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때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핵심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선순위는 그들의 창의성을 지키고, 키워주고, 그들의 꿈을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데 있지, 그들이 질서를 위한 부품이 되게해서는 안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누구와 가까운가? 일본의 케니치 호리에와 인도의 수하스 고피나스 중에서. 일본과 인도는 GDP 및 각종 지표가 엄청 차이나지만, 실질적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기대의 차이가 그들의 삶의 결과를 다르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국가의 미래마저 다르게 만들고 있다.
이젠 우리가 그 희망을 가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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