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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유권 상실의 시대, 다크나이트를 지켜줘

체리사탕 2011. 3. 5. 08:07

2008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종전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깊이를 더한 배트맨 시리즈 신작, ‘다크나이트’를 내놓는다. 이 영화는 온갖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고, 범죄가 끊이지 않는 고담시를 지키기 위해 영웅의 길을 택하지만 동시에 범법자의 그늘 속에 살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같은 해, 대학교 휴학생 장혜영(해멍)은 친구 다섯 명을 모아 ‘멍큐멘터리 팀’을 만들고, 청소년 미디어 창작지원 프로젝트인 유스보이스의 사전제작지원을 받아 ‘다크나이트를 지켜죠’란 영화를 찍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인 다크나이트는 배트맨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토렌트 등의 파일 공유 기술을 통해 이른바 불법으로 내려받는 수많은 해외 영상 콘텐츠에 자막을 다는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에게 다크나이트란 이름을 붙여줄 만한 이유는 있다. 그들은 아무 경제적 보상 없이 많은 시간을 들여 자막을 만들어 해당 콘텐츠가 국내에 확산되고, 구매력이 있는 팬을 만들고, 시장을 형성하는 데 힘을 보탠다. 그러나 그들이 저작권이 있는 대본을 바탕으로 2차 저작물(자막)을 만드는 이상, 그들은 범법자로 정의된다.

영화 속 다크나이트는 수많은 흥행과 인기의 대상이지만, 실제 현실 속 다크나이트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콘텐츠에 대한 자막을 통한 애정 표현과 범법 행위로 구속하는 제도적 장치의 압박 속에서 고민한다.

최첨단 무기를 사비로 구입할 수 있는 엄친아 배트맨에 비해서 현실의 다크나이트들은 너무나 평범하다.

대개가 청소년 혹은 대학생인 ‘다크나이트를 지켜죠’의 인터뷰 대상자 중 일부는 그들이 불법 행위를 하는 지도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법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단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 불법일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없는 자막 제작에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여덞 시간에 이르는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자신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다른 사람들도 보게 하기 위해서, 좋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혹은 자막 제작 행위를 통해 자기 동료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나눔이 죄가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술, 문화 그리고 제도간의 ‘변화의 속도’ 차이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콘텐츠를 개인이 저장하고, 복제하고, 심지어 리믹스하는 모든 과정이 디지털 혁명이라는 단어가 친숙해진 만큼이나 쉬워졌다. 다시말해, 이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었던 콘텐츠 생산과 유통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 숫자가 이제는 전세계 수십억 인구로 확산됐다.

그렇게 참여를 부르는 기술의 성격에 따라 우리의 문화도 바뀌어갔다. 매스미디어가 우리에게 준 소비자의 고정 관념이 TV 앞에 앉아 등을 기대고 멍하니 보고 있는 개인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뉴미디어 소비자는 그같은 고정 관념에 구속되지 않는다. 뉴미디어는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를 만든다. 웹 2.0의 ‘참여-공유-창조’ 패러다임이 의미하듯, 그들이 주도하는 콘텐츠 생산은 이제 새로운 산업 발전을 이끄는 부가가치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제도의 변화는 그같은 기술과 문화 발전에 호응하지 않는다. 하버드 로스쿨의 요하이 뱅클러가 그의 역저 ‘네트워크 부론’에서 강조한 것처럼, 기존 콘텐츠 생산, 유통 업체에선 소비자는 여전히 소비자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저작권법 등의 제도이다. 뱅클러는 기술과 문화를 앞세운 이용자들과 제도를 앞세운 기성 산업 간의 공방을 ‘제도 생태계를 둘러싼 전쟁’(battles on institutional ecology)이라 부른다. 그 전쟁은 1998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 2005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그록스터 판결의 제도적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이용자 참여와 공유를 촉진하는 기술과 문화가 지속하는 이상 지속되고 있다.

나아가, 이 시대의 변화에 제도를 통해 억압하는 정책이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일 수 있는 팬을 가장 강력한 적대층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전세계를 달구었던 ‘해리포터 전쟁’을 기억하는가?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으로부터 판권을 사들인 워너브라더스는 2010년 12월1일 영국의 10대 소녀 클레어 필드에게 메일을 보낸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더 보이 후 리브드’(The Boy Who Lived)의 URL이 ‘harrypotterguide.co.uk’라서 이용자들에게 해리포터의 지적 재산과 혼동을 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워너브라더스에게 그 권리를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워너브라더스와 그들이 고용한 변호사 입장에선 그들이 정의의 편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지적재산권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도, 경제적 이익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불법을 넘어 ‘양심’의 문제이니까. 문제는, 그 양심의 소유자가 단지 해리포터를 열렬히 좋아하는 10대 소녀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해리포터 팬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바라는 것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었고, 단순히 자신히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그래서 클레어와 그의 아버지는 법적 공방과 함께 언론으로 워너브라더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유사한 도메인 분쟁 문제 전문가인 알라스태어 알렉산더 도움으로 전국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됐다. www.PotterWar.org.uk라는 포터 전쟁 사이트가 만들어졌고, 그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제는 전국을 넘어 지구적인 해리포터 팬 네트워크 조직이 만들어져 저항 운동이 시작됐다. 한 예로, 미국에서는 히더 로버라는 ‘더 데일리 프로펫’(The Daily Prophet)이란 사이트 운영자가 암흑 마법 저항군(DADA: Defense Against the Dark Arts)라는 조직을 형성해 대서양 양안의 포터 저항군이 탄생했다.

결국 워너브라더스는 PR 측면에서의 손실을 고려해 기존의 강경책을 굽힐 수 밖에 없었다. ‘오타쿠’를 적극 수용해 발전해 온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산업계의 성찰에 비하면 때늦은 깨달음이었다.

물론 이같은 고민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산업의 균형점을 한 순간에 다른 한쪽의 편으로 옮겨가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균형점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론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점을 던지는 것이다. 분명 현행 법과 제도에 따르면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은 제작자 혹은 배급사에게 있다. 그러나 그 콘텐츠를 둘러싼 팬 문화, 그 팬 문화의 소산물인 각종 리믹스 영상, 팬 창작 소설 등이 저작권 위반으로 규정된다고 하는 것은, 콘텐츠를 넘어 해당 ‘문화’의 권리가 누구의 것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산업계 고민을 넘어 우리 사회체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표현의 자유에 기초한 참여의 문화의 법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표현의 자유가 핵심인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만큼 이제는 보편적 권리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의 자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로 구성돼 있다. 이 네 가지 권리가 상호 연관되는 까닭은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출판을 할 수 있으며, 출판의 기술은 집회의 형성을 강화시키고, 집회의 형성은 결사체의 성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에 따르면 이 결사체의 형성이 민주주의 근간이다. 19세기 초 당시 미국을 방문했던 그는 이 신생 국가에 민주주의가 번창할 수 있던 까닭이 시민들이 만든 수많은 자발적인 조직들이 신생 국가의 민주주의를 아래에서부터 든든히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MIT에 비교 미디어 연구소(CMS)를 설립해 공동 운영했었던 미디어 이론가 헨리 젠킨스에 의하면, 이 자발적 결사체의 전통은 이제 대중문화의 팬덤에서, 그리고 그 팬덤이 인터넷 기술을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확장돼 나타나는 웹 2.0에서 확인된다.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정치적 시위와 투쟁을 위해, 종교 활동과 자원 봉사를 위해 참여하는 비율은 감소하고 있을 지라도, 온라인을 통해 콘텐츠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애정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조직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지난 십수년 동안 우리가 목격한 것처럼, 그같은 온라인 활동은 계기가 주어지면 대규모 오프라인 활동으로 쉽게 변모한다. 이들 이용자들의 온라인 활동이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위 중 하나인 콘텐츠 ‘소비’를 ‘참여’로 만드는 것인 만큼, 산업을 넘어서 참여적 민주주의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현상이다.

따라서 이들 팬들, 이용자들의 콘텐츠 생산과 분배에 대한 참여를 어디까지 합법이고 어디부터 불법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인종과 성과 지역의 차별을 극복해온 지난 사회 발전사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에 기초한 한쪽의 이해 관계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산업계에서 소비자와 이용자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공론의 주제로 격상되어야 할 주제다.

우리는 왜 디지털 나눔은 나눔이라 부르지 못하는가. 21세기의 한국과 세계를 이끌어 갈 우리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을 다크나이트로밖에 부를 수 없는 그 본질적 이유를 이제 함께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