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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갖춘 기계들의 생태계, 이제 그들과 소통할 때

체리사탕 2011. 3. 5. 08:11

근대 합리주의는 기계와 인간 사이에 엄격한 경계의 벽을 세워 왔다. 기계는 기계,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고. 인간의 정신은 기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라고. 과연 그러할까?

사실 은연중에도 인간과 기계의 ‘정신적, 인격적 교감’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MIT 사회학자 쉐리 터클은 “인간이 사실상 기계를 인간과 구분된 물질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의 일부, ‘두 번째 자아’(second self)로 취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드는 한 가지 예를 보자.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전화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전화’가 암시하는 것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나’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화’는 내 ‘자아의 일부’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기계에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만든 것은 인간이다. 고대 그리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지상 최대의 미를 좇다, 자신이 만든 완벽한 여인의 형상인 ‘갈라테아’라는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비원에 응답하여 갈라테아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갈라테아에게 영혼을 부여한 것은 여신의 신비다. 그러나 동시에 피그말리온의 갈망이었다.

그러나 기계의 마음이 존재하는 까닭이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 작용만은 아니다. 물론, 이 부분을 명확히 하려면 마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기계에 ‘자유 의지’가 존재해 피그말리온 사례처럼 인간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계도 인간의 인식과 행위를 그들이 원하는 틀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평론가인 닐 포스트만이 표현한 것처럼 그들도 ‘그들만의 욕구’가 있다.

포스트만이 그의 책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들었던 예에서 생각해 보자. 링컨과 더글라스는 연설 무대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3~4시간씩 논쟁을 벌였다. 반면, 케네디와 닉슨은 TV 토론에서 우리가 익숙한 3~5분 내의 짧은 의견 교환을 했다. 이 같은 차이는 미디어의 차이, 기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활자에서 영상으로, 신문에서 방송으로 미디어의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기계가 인간에게 이성적 대화보다는 ‘감각적 인식’을 더 중요한 소통 패턴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인간만 기계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이’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계도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반영’시킬 수 있다.

이렇게 기계에게도 ‘마음’이 있을 수 있다면, 자기만의 욕구를 가진 기계들이 상호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 IT 잡지 ‘와이어드’의 시니어 편집자로 일해온 케빈 켈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계들의 생태계’(technium)다. 일례로,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을 장소 중 하나인 사무실 안을 생각해보자. 사무실에 설치된 컴퓨터, 전화기, 그 외 각종 전자 기기들이 상호 연결되어 상호 의존하는 ‘일종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매년 새로운 제품이 개발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현상은 우리가 기계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만들 뿐 아니라, 기계 역시 우리에게 기대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 관련이 될까? 그것은 그 같은 기계의 진화의 연속이 ‘우연’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 양이 매년 또는 적어도 매 18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 비슷한 원리로 저장 공간에 적용되는 ‘크라이더의 법칙’ 등이 그 예이다.

이처럼 발전된 기술이 얼리어답터의 구매를 통해 그 고비용의 가치가 증명이 된다면, 진입 업체의 확대를 통한 제품 생산의 다양화, 생산 규모의 증대를 통해 앞서 ‘무어의 법칙’과 ‘크라이더의 법칙’에서의 경우처럼 성능과 가격이 반비례해 급속히 보급된다. 그렇게 한 기계가 ‘보편화’되면 그 유행에 편승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 새로운 문명의 편리에 동참하기 위해 해당 기계를 사용하게 된다. 이처럼 ‘기술 발전’이 ‘문명의 기준’을 정하는 상황은 케빈 켈리가 1990년대 중반에 쓴 책의 제목처럼 ‘통제 불능’(out of control)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기계와 기술 발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기술 발전’이 ‘문명의 기준’임을 거부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케빈 켈리가 2010년 10월에 발표한 저서 ‘기술은 무엇을 원하는가?’(What Technology Wants)에는 아미쉬 해커 이야기가 나온다. 아미쉬는 미국내에서 기계 문명이 공동체 종교 생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지금도 마차를 끄는 등 종래 삶의 패턴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달리 해석하면, ‘기술 진보’에 따라 ‘삶의 패턴’이 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기술 생태계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자기 삶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미쉬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전력 등의 보편화된 기술을 ‘부분적’이고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부분적이고, 전략적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아미쉬 부락의 해커들이 그 기술을 실험해보고, 그 기술을 그들 공동체의 목적에 맞게 교정한다는 뜻이다.

좀 더 결정적인 것은, 이 아미쉬 공동체가 거주하는 곳은 북미 지역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 아미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놀라운 기술 문명이 보편화된 북미 지역에만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들의 반기계 정서가 사실은 기계 문명과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보인 예처럼, 아미쉬 부락의 해커들에 의해 필요한 기술을 끌어올 수 있는 ‘환경’이, ‘기술 생태계’가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들의 기술 문명과 일정 부분 독립된 삶은 불가능하다.

이 기술과 절연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그 기술 생태계가 제공하는 가장 큰 매력인 ‘편리’와 그 편리를 통한 ‘자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하다. 인간이 문명 속에서 삶을 시작해 온 이래, 어떤 삶의 방식도 이 기술 진보를 통해 변화하는 인간 삶의 흐름을 종국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같은 기술 발전이 인간 삶에 미치는 결정력을 받아들이면서, 그 진보를 기술’만’의 진보가 아닌 인간 삶의 ‘진보’와 직결시키는 것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로 유명한 감독 조지 루카스는 지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이성은 기술 발전에 기반해 수직 성장한 반면, 인간의 감정적 통제는 수평적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말했다. 기술이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는 더 다양하고 거대해졌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관리하는 우리의 능력은 그에 비례해 상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류 전기, 머신 건, 비행기, 잠수함, 라디오, TV, 영화,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기술 발전이 그들이 약속한 평화를 인류에게 주지 못한 까닭이다. 우리가 우리의 물리적 ‘능력’에 비해 정신적 ‘철학’을 키우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히했다는 반증이다.

이제 새로운 기계 문명의 도래, 디지털 혁명의 본막이 올랐다. 앞으로 한 차례 더 큰 기술 생태계의 빅뱅이 다가온다. 비트는 더 이상 비트가 아니다. 비트는 음반, 영화, 책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 기기의 확산, 소셜 미디어 환경의 정착, ‘이제는 소셜 웹 시대’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비트이고, 웹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사회가 이미 도래했다. 지금 우리에겐 비트와 소통해 기술의 진보를 인간의 진보로 연결시킬 수 있는 ‘철학의 힘’, 즉 ‘기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절실하다. 이제는 더 늦은 후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술과 인간의 소통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계속 고민하게 한다. 인간에게 기술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기술은 인간에게 무엇이고, 무엇이었고, 앞으로 무엇일 것인가. 이제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넘어서, 인간과 기계의 소통이 우리 삶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젠 인간과 인간이 만든 기술, 정보의 생태계에도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