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윤덕의 사람人] 부암동 '착한 만두집' 이야기
101세 할머니와 손녀딸 "사람 사는 情을
빚어요"
할머니의 이야기 - 남편? 하도 오래돼
올상갈상해
두 시아주버님들이 재산 날려먹어…
그릇때기 하나없이 시작했지
부부싸움? 그냥 꼴딱 삼키고 잊어
손녀딸의 이야기 - 지금 만두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式… 엄마가 꾹 쥐었다 펴면
얼마나 예쁜 만두가 나오던지…
우리 집 만두는 추억이요 情이다
보랏빛 노을, 신선(神仙)이 사는 곳에 서리는 노을이라 하여 '자하(紫霞)'라 불리던 서울 부암동에 만두 파는 집이 있다. 애초에 "우리 만두 팝니다"며 정색하고 시작한 일 아니라 간판도 없다가, 하나둘 늘어난 단골들 오며 가며 붙여준 이름이 '자하손만두'다. 한겨울 이 언덕배기 양옥집에 들러 만둣국을 맛본 한 중년 사내는 "뜨끈한 국물에 서러운 마음이 풀리고, 탱글한 만두 하나에 옹이진 고민을 잊었노라"고 예찬했다. 미식(美食)을 자랑하는 사람들 중 이 집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맛의 비결은 '사람'이었다. 만두는 그 사람 생긴 대로 빚어진다더니, 만두 빚는 이 집 여인들 이야기가 딱 그러하다. 올해 101세 된 윤순이 할머니와 '이대(梨大) 나온' 교사 출신 손녀딸 박혜경(57)씨. "만두 하나면 됐지, 우리들 사는 이야기 내세울 것 없어 인터뷰는 사양해왔다"는 혜경씨를 졸라 만두집을 연 사연, 그 정신적 지주인 윤 할머니의 100세 인생을 들었다. 혜경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에게 부탁해 1년 전부터 할머니의 일상, 만두집의 사계(四季)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먼저 만두 이야기다.
■ 대물림? 손녀딸이 시작한 간판 없는 만두집
자하손만두의 주인은 윤 할머니의 외동손녀딸 혜경씨다. 1993년 인왕산이 개방될 때 만두집을 열었다. 간판도 없었다. 주문받아 이집저집 만들어주다, 마당에 파라솔 3개 펴서 등산객을 맞았고, 손님이 많아지니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집을 식당으로 개조했다. 2005년엔 신세계백화점으로부터 '입점' 요청을 받을 만큼 서울 장안에 유명한 '맛집'이 됐다.
―할머니로부터 대물림한 만두집인 줄 알았다.
"대개의 스토리가 그러니까. 할머니는 만두집 하는 거 남부끄럽다며 반대하셨다."
―왜 만두였나?
"당시 집안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올케와 둘이 뭔가를 해볼 참이었다. 우연히 만두 맛있다는 집에 가서 먹어보니 이 정도면 나도 만들겠다 싶더라. 어릴 때부터 우리 집 가장 큰 별식이 만두였으니까. 겨울이면 할아버지부터 손자들까지 온 식구가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자하손만두'의 만두는 할머니식 만두인가.
"할머니의 서울식 만두는 밀대로 밀지 않고 송편 빚듯 반죽을 고깔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를 넣었다. 지금 만두는 마흔넷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식 만두다. 엄마가 만두피에 소를 넣어 한손에 꾹 하고 쥐었다 펴면 예쁜 만두가 나왔다. 손이 얼마나 빠르신지, '만두 한다' 하면 연탄불에 물부터 올렸다. 만두 빚기 무섭게 삶아야 하니. 그 비결을 내가 배웠다."
―처음부터 손님이 많았을까.
"아니다. '다 맛있다는데 왜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거야', '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저 차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하며 한숨 쉬던 시절이 있었다."
―왜 이 외진 동네까지 만두를 먹으러 올까.
"내가 할머니, 어머니를 닮아 음식을 덜퍽지게, 치장해가며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먹어서 배부르고, 영양도 가고, 마음도 흡족하게 하는 '착한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아니다' 하는 부분은 단호히 지킨다."
―조미료 얘긴가?
"식품회사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조미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음식 만드는 데 굉장히 도움을 준다. 요즘 식재료들이 그 자체로 진수의 맛을 못 내니까. 하우스에서 나오고, 제철이 아닐 때 나오고, 수입식품이 대부분이고. 맛이 희미하니 조미료를 넣는 거다. 내가 그걸 안 하는 이유는 '조금만 쓰지' 하고 시작하면 나중엔 절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냥 평준화가 되는 거다."
―신세계에 들어가 고전했다 들었다.
"백화점 식당가에 아무나 입점할 수 없다던데, 우리는 '그래, 한번 가주지 뭐' 하고 나갔다(웃음).한데 우리 식당만 손님이 텅텅 비더라. 누가 조미료를 써야 한다고 했다. 백화점은 대중적인 맛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면서. 허락 안 했다."
―그래도 6년째 버티고 있다.
"내가 좀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데가 있다. 다행히 작년부터 조금씩 수익이 난다. 깨끗한 음식 알아주시는 분들 많이 와주시면 좋겠다. 어디 가서 이런 만둣국 드시겠나. 하하!"
■ 밑지더라도 속여서 음식을 만들진 않는다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교단 대신 왜 만두집인가?
"교사를 2년 했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내 능력에 부쳤다. 아기 낳은 핑계로 살림만 하려고 했는데 남편 하는 일이 잘 안됐다. 특별히 솜씨 좋게 음식을 턱턱 해낸 건 아니다. 평생 먹어온 게 서울 음식이고 할머니, 어머니가 음식을 잘하셨으니 먹고 자란 기본으로 운명처럼 하게 됐다."
―맛을 내는 비결이 뭔가.
"좋은 재료. 부드러운 두부, 기름기 많지 않은 고기, 싱싱한 숙주가 기본이다. 다음이 적절한 조리 아니겠나. 계량화해야 하는데 여전히 손맛으로 하니 구식이다."
―진짜 비결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전에는 밀가루 반죽까지 발로 다 밟았다. 오후 서너시쯤 반죽을 방에 넣어주면 꽈리가 나도록 밟았다. 근데 참 이상하다. 사람 몸에 에너지가 있는지, 기계를 쓴 것과 사람 손이 닿은 것에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네 귀로 접는 '편수'가 맛있더라.
"처음엔 김치만두만 했다. 너무 획일적이고 재미없어서 속과 모양을 바꿔봤다. 궁중에서 먹던 편수는 따로 배웠다. 소고기와 표고버섯이 주재료다. 호박보다는 아삭한 오이가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고, 차가운 양지 국물에 띄워내도 좋아하시더라."
―단골 중에 명사들이 많다던데, 누가 오시나.
"말 안 하고 싶다. 명사들만 우리 손님은 아니니까. 아쉬운 건 예전엔 '몰래 두고 온 집'처럼 애틋한 맛이 있었는데 사람 많은 요즘엔 줄 서야 하고 시끄러우니 안타까워들 하신다."
―장사가 잘되면 음식 맛이 변한다고들 하더라.
"맛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면 안 되지. 밑지더라도 음식을 속여서 만들진 않는다."
―엄나무 손만두 같은 새로운 만두도 개발했더라.
"산림청 계신 분이 엄나무 순에 항노화·항암 성분이 있다고 귀띔해주셔서. 봄에 잠깐 날 때 구해서 만들어봤는데 반응이 좋아 한 달 만에 바닥이 났다."
―앵두화채는 단골들에게만 나오는 별미라던데.
"나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암동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셨다. 복숭아꽃, 앵두꽃이 지천이었지. 봄이면 일꾼들이 허리에 깡통을 꿰어차고 앵두를 따서는 큰 광주리에 갖다 부었다. 한 주먹씩 쥐어 먹던 앵두 맛이 그리워 화채로 만들어봤다. 할머니가 앵두 씨 발라주시면 그걸 설탕에 버무려서 냉동시켰다가 셔벗처럼 내놓는다."
―'추억의 음식'들이다. 할머니와 손녀딸 사이가 각별하고.
"내가 대학졸업하던 해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셔서 할머니를 엄마처럼 의지하고 살아왔다. 내겐 누구보다 소중한 분이다."
■ "나의 아버지는 고종황제 모시던 무예청 별감"
자하손만두의 '정신적 지주'인 윤순이 할머니는 겨우내 자리를 비웠다. 혹독한 추위 때문이기도 했고, 잠시 병원 신세도 졌다. 신장에 염증이 생겼다. 만두집 현관 모퉁이에 그림처럼 앉아 있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단골들은 안부를 걱정했다. "이제 돌아가시려나." 하지만 윤 할머니는 3일 만에 퇴원했다. "아직 건강하십니다"라는 의사의 확언이 있었다. 얼마 전 장 담그는 날에도 할머니는 어김없이 '출근'했다. 메주가 잘 띄워졌는지, 소금간은 맞는지, 손녀딸의 부축을 받아가며 일일이 간섭했다. 인터뷰를 하러 왔다고 하자, 쩌렁쩌렁 목청을 높이신다. "누굴 만나러 와? 나를? 다 죽어가는 숭헌 얼굴 찍어서 뭐하게. 억지로 모진 목숨 따버릴 수도 없고. 나이가 100살이 뭐여, 100살이…." 기억력이 감퇴되어 '몰라' '기억 안 나' 하시는 대목이 많았지만, 그 걸걸한 육성에는 천수를 누린 여인의 지혜와 유머가 담겨 있었다.
―이화동에서 태어나셨지요? 아버님은 뭐 하시던 분이었어요?
"황제의 무관이었지. 무예청 별감. 시방으로 치면 군인. 내 위로 언니 한 분, 남동생 셋이 있었지."
―황제라면 고종황제요?
"상감님 이름을 누가 입에 담어. 그냥 황제인 거지."
―아버님 존함은 기억하세요?
"그럼. 길 영(永)자에 석 삼(三)자를 쓰셨지. 언제고 상감님 옆에 계셨어. 한 달에 한 번 저기 정자(석파정)에도 상감님 모시고 출타하셨지. 키도 크시고 옷도 상감님 부럽지 않게 화려했어. 시방은 개차반이지. 아무리 돈들 가지고 산대도 옷 입은 거, 사는 거 보면 뒤죽박죽이야."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대궐서 주무시는 날이 많고, 집에 오시는 날짜는 따로 있었지. 오실 땐 대궐서 잡숫던 거 싸가지고 오셔서 우리가 호강을 했지. 명절이면 아버지가 상급으로 홍(紅)공단을 받아오셔서 설빔을 해 입고. 도톰하고 좋아서 (옷이) 꺾어지질 않었어."
―할머니는 어떤 아이였어요?
"옛날 어른들은 (딸들을) 마구 굴러먹는 선머슴처럼 기르지 않었거든. (여자가) 어딜 대문 밖을 나가고 그래. 밖을 내다보다가도 누가 삐끗하면 얼른 닫고 들어왔지. 지금은 막무가내야. 제멋대로들 살지."
―1919년 1월에 고종 임금이 돌아가셨지요.
"(내가) 열 살이나 됐겠지. 굉장했어. 서울 장안에 사람들이 다 모이고, 시골서도 구경오느라 길이 메이고. 국상이니까, 상감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양반들 줏대기가 꺾였으니 나라가 약해졌지. 그러다 빼앗겼지."
―3·1운동은 기억나세요?
"만세운동? 지금은 댈 것도 아니지. 사람들이 다 들고 나와서 정말 굉장했지. 무서웠지."
―6·25 전쟁도 기억나시죠?
"몰라. 시방 내가 100살이야. 그런 걸 다 기억하면 내가 늙은 게 아니게?"
―피란은 가셨을 거 아니에요?
"(한강)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못 갔지. 다행히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처신을 잘해서 큰 피해는 없었지. 중공군이 왔는데 그것들 매너가 괜찮아. 자기네 쌀 가지고 와서 밥을 좀 해달라고만 하지, 우리 것을 빼앗거나 하진 않었거든. 네 것은 네 것, 내 것은 내 것."
―대통령 하신 분들 중엔 누가 마음에 드셨어요?
"대통령? 내가 겪어봤어야 알지. 한자리에서 봤어야 좋다, 나쁘다 말을 하지. 바로 앞에서 말을 하다가도 빗나가는 게 사람인데, 멀리서 보고 그 사람을 어떻게 알어?"
■ 부부싸움? 그저 꼴딱 삼키고 잊어야지
―열아홉 살에 부암동 박씨 집안으로 시집가셨지요?
"아버님 대궐 친구 분이 중매해서 갔지. 우리 남편이 막내아들인데 내가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고 살았어."
―옛날엔 시집살이가 매웠다잖아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 부모에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니 요만큼도 거침이 없었어. 사람에겐 본밑이라는 게 있잖어. 거기가 내 본가라 여겼지. 힘든 줄도 모르고 살았어.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으면 어느 부모가 자식이랑 살어. 언제든 복이라는 게 있거든. 부모는 부모답게 대우를 해야 자식이 그 복을 받는 거지."
―서방님(박계동·1989년 작고)은 어떤 분이셨어요? 잘생기셨어요?
"남편? 하도 오래되어서 올상갈상하지. 숭악허게 생기진 않었어(웃음).나보다 아홉 살이나 많으셨지. (지금의 하림각 뒤에서) 과수원을 했어. 위로 두 시아주버님들이 살림을 홀랑 날려 먹어서 우린 맨손으로 시작했지. 요만한 그릇때기 하나가 없었어. 둘이서 만날 일만 했지. 앵두가 열리면 그걸 퍼가지고 와서 길바닥에서 팔고, 능금이 달리면 또 한 무더기 들고 나와 팔았지. 신용이 좋아 나중엔 남대문 시장까지 물건을 댔지. 우리 남편은 뭘 하나 잡으면 놓질 않었어."
―젊은 여자분이랑 바람도 한번 나셨다던데.
"몰라. 기억 안 나. 할아버지 때문에 내가 고생은 안 했어. 집안을 일으키려고 얼마나 지독하게 살었는지. 그 양반 쫓아갈 그림자도 없다고 동네 사람들 칭찬이 자자했어. 종당에는 기와집 짓고 잘살다 가셨지."
―부부싸움도 하셨을 것 아녜요?
"남자 하는 거 못마땅하고 비위에 거슬려도 꿀꺽 참고 살아야지. 꼴딱 삼키고 잊어야지. 싸움이 달래 나는 줄 알어? 마주쳐야 쌈을 하지. 부부간에 서로 비참한 말은 안 했어."
―할머니 음식 솜씨가 대단하셨다면서요. 민어찌개도 맛나게 끓이시고.
"옛날엔 지금처럼 음식이 맛없지 않았어. 물자를 많이 안 들여도 음식이 맛깔스러웠거든. 이만한 민어를 사 오면 호박 툭툭 잘라 넣고 고춧가루 풀어서 찌개를 끓였지. 예전엔 호박 하나만 넣어도 국물이 달착지근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 거름을 안 써서 그래. (채소가) 계절 없이 나와서 그래."
―나박김치도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단시간에 왁짝(급히) 익혀야지. 먹기 전날 담가서 이불을 덮어놨다가 다음날 확 벗겨서는 미나리 숭숭 썰어 새파랗게 먹어야 쨍하게 맛이 나지."
―만두 빚는 솜씨를 손녀딸에게 물려주신 거네요.
"만두는 혜경이 에미(며느리)가 잘했지. 그게 꾹꾹 (만두소를) 집어넣으면 되는 것 같아도 재주가 있어야 해. 덜렁덜렁 살림 못하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 뒷손 없고, 널브러뜨리고, 낭비하는 거."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세요?
"비빔밥은 안 먹어. 음식은 깔끔하고 정갈해야지."
■ 팔십? 그때 우리 할머닌 날아다녔지요
윤 할머니는 80세 넘어 처음 병원 문턱을 넘었다. 그것도 백내장 수술을 위해. "팔십에 난 달아 다녔지." 혜경씨에 따르면, 할머니는 보약은커녕 영양제 한 알 드시지 않았단다. 남자 못지않게 굵은 손목이 말해주듯, 할머니에겐 집안일, 농사일이 운동이었다. 요즘도 잣 고깔 따고, 앵두 씨를 빼고, 냅킨을 접는다. 지금도 중학생 증손자의 교복을 다리고, 혜경씨 해진 버선을 기우고, 당신 속옷을 손수 빨아 입으신다. 정 할 일이 없으면 불경을 읽는다. 혜경씨는 "100세가 넘도록 당신 자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지켜가는 모습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건강비결이 따로 있을까?
"소식하시고, 과일 좋아하시고, 잠 잘 주무시고. 일단 음식을 탐하시지 않는다. 과하고 지나친 정도를 기막히게 판단하신다."
―보약 같은 것도 드시나?
"팔순 넘어 손자들이 해 드렸지, 그전엔 영양제 한 알도 안 드셨다. 워낙 소박하게 사신 양반이다. 그릇 한죽(10개)씩 사서 모으는 욕심 외에는, 양장 한번 해 입는 일이 없고, 화장도 안 하셨다. 한복도 재봉틀로 손수 지어 입으시고, '구루무'도 끈적거려 싫다 하시고. 요즘엔 내가 인사동에서 한복을 해다 드리면 '곧 불구덩이 들어갈 텐데 옷은 왜 해오느냐'며 타박하신다."
―스트레스는? 어떤 할머니들은 욕으로 푸시지 않나.
"들어본 적 없다. 꼬장꼬장 잔소리는 하셔도.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신다. '번지 없는 주막'. 웃음도 '껄껄껄' 하고 웃으신다. 천생 여인인데, 대범하시다. 지금 이 집 얻을 때 동네 사람들이 여기서 누가 자살을 했다며 집터가 안 좋다고 하더라. 께름칙한데, 할머니가 '집터는 사람이 누르고 사는 거다, 그런 말에 기죽지 마라' 하시더라."
―전쟁은 피해 가셨지만, 할머니에게도 씻기지 않는 상처가 있지 않을까.
"큰딸과 막내아들, 며느리를 당신보다 앞세운 것. 할머니가 갈치 구운 걸 안 잡수신다. 갈치와 관련된 사고로 큰딸을 잃으신 것 같더라. 애써 잊고 싶으신지 여쭤봐도 대답 안 하신다. 아픈 기억은 훌훌 털고 좋았던 기억만 안고 가시려고 애를 쓰신다."
―할머니가 바쁘시다.
"외로울 겨를이 없으셨던 것, 그게 할머니의 진짜 장수 비결 아닌가 싶다. 어떤 손님은 할머니를 왜 식당에 나오게 하시느냐 묻는데, 들고나는 손님들과 인사하는 것, 직원들 형편까지 일일이 살피는 것, 거기서 에너지를 얻으신다. 직원들에게도 출근하면 할머니에게 가장 먼저 인사하고 정성껏 모시라고 부탁한다. 당신이 '필요한 사람,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해 드리는 거, 그게 자손들의 할 일 아닐까."
↑ [조선일보]
↑ [조선일보]
↑ [조선일보]
↑ [조선일보]
↑ [조선일보]
↑ [조선일보]
↑ [조선일보]“만두가 울겠네. 거지 같은 할멈이랑 같이 사진을 찍으니….” 올 들어 부쩍 귀가 어둡고 기력이 쇠하였지만 윤순이 할머니의 입담은 유머로 가득해서 주위에 웃음꽃을 피웠다. “사람은 사람인데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배고프면 꿀꿀 소리도 지르고 그러잖어? 그런데 안 그래. 모진 목숨 억지로 따버릴 수도 없고. 하하!” 자하손만두의 만두 한알 한알이 두 여인의 마음을 닮았다.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 대물림? 손녀딸이 시작한 간판 없는 만두집
자하손만두의 주인은 윤 할머니의 외동손녀딸 혜경씨다. 1993년 인왕산이 개방될 때 만두집을 열었다. 간판도 없었다. 주문받아 이집저집 만들어주다, 마당에 파라솔 3개 펴서 등산객을 맞았고, 손님이 많아지니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집을 식당으로 개조했다. 2005년엔 신세계백화점으로부터 '입점' 요청을 받을 만큼 서울 장안에 유명한 '맛집'이 됐다.
―할머니로부터 대물림한 만두집인 줄 알았다.
"대개의 스토리가 그러니까. 할머니는 만두집 하는 거 남부끄럽다며 반대하셨다."
―왜 만두였나?
"당시 집안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올케와 둘이 뭔가를 해볼 참이었다. 우연히 만두 맛있다는 집에 가서 먹어보니 이 정도면 나도 만들겠다 싶더라. 어릴 때부터 우리 집 가장 큰 별식이 만두였으니까. 겨울이면 할아버지부터 손자들까지 온 식구가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자하손만두'의 만두는 할머니식 만두인가.
"할머니의 서울식 만두는 밀대로 밀지 않고 송편 빚듯 반죽을 고깔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를 넣었다. 지금 만두는 마흔넷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식 만두다. 엄마가 만두피에 소를 넣어 한손에 꾹 하고 쥐었다 펴면 예쁜 만두가 나왔다. 손이 얼마나 빠르신지, '만두 한다' 하면 연탄불에 물부터 올렸다. 만두 빚기 무섭게 삶아야 하니. 그 비결을 내가 배웠다."
―처음부터 손님이 많았을까.
"아니다. '다 맛있다는데 왜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거야', '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저 차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하며 한숨 쉬던 시절이 있었다."
―왜 이 외진 동네까지 만두를 먹으러 올까.
"내가 할머니, 어머니를 닮아 음식을 덜퍽지게, 치장해가며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먹어서 배부르고, 영양도 가고, 마음도 흡족하게 하는 '착한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아니다' 하는 부분은 단호히 지킨다."
―조미료 얘긴가?
"식품회사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조미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음식 만드는 데 굉장히 도움을 준다. 요즘 식재료들이 그 자체로 진수의 맛을 못 내니까. 하우스에서 나오고, 제철이 아닐 때 나오고, 수입식품이 대부분이고. 맛이 희미하니 조미료를 넣는 거다. 내가 그걸 안 하는 이유는 '조금만 쓰지' 하고 시작하면 나중엔 절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냥 평준화가 되는 거다."
―신세계에 들어가 고전했다 들었다.
"백화점 식당가에 아무나 입점할 수 없다던데, 우리는 '그래, 한번 가주지 뭐' 하고 나갔다(웃음).한데 우리 식당만 손님이 텅텅 비더라. 누가 조미료를 써야 한다고 했다. 백화점은 대중적인 맛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면서. 허락 안 했다."
―그래도 6년째 버티고 있다.
"내가 좀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데가 있다. 다행히 작년부터 조금씩 수익이 난다. 깨끗한 음식 알아주시는 분들 많이 와주시면 좋겠다. 어디 가서 이런 만둣국 드시겠나. 하하!"
■ 밑지더라도 속여서 음식을 만들진 않는다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교단 대신 왜 만두집인가?
"교사를 2년 했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내 능력에 부쳤다. 아기 낳은 핑계로 살림만 하려고 했는데 남편 하는 일이 잘 안됐다. 특별히 솜씨 좋게 음식을 턱턱 해낸 건 아니다. 평생 먹어온 게 서울 음식이고 할머니, 어머니가 음식을 잘하셨으니 먹고 자란 기본으로 운명처럼 하게 됐다."
―맛을 내는 비결이 뭔가.
"좋은 재료. 부드러운 두부, 기름기 많지 않은 고기, 싱싱한 숙주가 기본이다. 다음이 적절한 조리 아니겠나. 계량화해야 하는데 여전히 손맛으로 하니 구식이다."
―진짜 비결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전에는 밀가루 반죽까지 발로 다 밟았다. 오후 서너시쯤 반죽을 방에 넣어주면 꽈리가 나도록 밟았다. 근데 참 이상하다. 사람 몸에 에너지가 있는지, 기계를 쓴 것과 사람 손이 닿은 것에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네 귀로 접는 '편수'가 맛있더라.
"처음엔 김치만두만 했다. 너무 획일적이고 재미없어서 속과 모양을 바꿔봤다. 궁중에서 먹던 편수는 따로 배웠다. 소고기와 표고버섯이 주재료다. 호박보다는 아삭한 오이가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고, 차가운 양지 국물에 띄워내도 좋아하시더라."
―단골 중에 명사들이 많다던데, 누가 오시나.
"말 안 하고 싶다. 명사들만 우리 손님은 아니니까. 아쉬운 건 예전엔 '몰래 두고 온 집'처럼 애틋한 맛이 있었는데 사람 많은 요즘엔 줄 서야 하고 시끄러우니 안타까워들 하신다."
―장사가 잘되면 음식 맛이 변한다고들 하더라.
"맛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면 안 되지. 밑지더라도 음식을 속여서 만들진 않는다."
―엄나무 손만두 같은 새로운 만두도 개발했더라.
"산림청 계신 분이 엄나무 순에 항노화·항암 성분이 있다고 귀띔해주셔서. 봄에 잠깐 날 때 구해서 만들어봤는데 반응이 좋아 한 달 만에 바닥이 났다."
―앵두화채는 단골들에게만 나오는 별미라던데.
"나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암동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셨다. 복숭아꽃, 앵두꽃이 지천이었지. 봄이면 일꾼들이 허리에 깡통을 꿰어차고 앵두를 따서는 큰 광주리에 갖다 부었다. 한 주먹씩 쥐어 먹던 앵두 맛이 그리워 화채로 만들어봤다. 할머니가 앵두 씨 발라주시면 그걸 설탕에 버무려서 냉동시켰다가 셔벗처럼 내놓는다."
―'추억의 음식'들이다. 할머니와 손녀딸 사이가 각별하고.
"내가 대학졸업하던 해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셔서 할머니를 엄마처럼 의지하고 살아왔다. 내겐 누구보다 소중한 분이다."
■ "나의 아버지는 고종황제 모시던 무예청 별감"
자하손만두의 '정신적 지주'인 윤순이 할머니는 겨우내 자리를 비웠다. 혹독한 추위 때문이기도 했고, 잠시 병원 신세도 졌다. 신장에 염증이 생겼다. 만두집 현관 모퉁이에 그림처럼 앉아 있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단골들은 안부를 걱정했다. "이제 돌아가시려나." 하지만 윤 할머니는 3일 만에 퇴원했다. "아직 건강하십니다"라는 의사의 확언이 있었다. 얼마 전 장 담그는 날에도 할머니는 어김없이 '출근'했다. 메주가 잘 띄워졌는지, 소금간은 맞는지, 손녀딸의 부축을 받아가며 일일이 간섭했다. 인터뷰를 하러 왔다고 하자, 쩌렁쩌렁 목청을 높이신다. "누굴 만나러 와? 나를? 다 죽어가는 숭헌 얼굴 찍어서 뭐하게. 억지로 모진 목숨 따버릴 수도 없고. 나이가 100살이 뭐여, 100살이…." 기억력이 감퇴되어 '몰라' '기억 안 나' 하시는 대목이 많았지만, 그 걸걸한 육성에는 천수를 누린 여인의 지혜와 유머가 담겨 있었다.
―이화동에서 태어나셨지요? 아버님은 뭐 하시던 분이었어요?
"황제의 무관이었지. 무예청 별감. 시방으로 치면 군인. 내 위로 언니 한 분, 남동생 셋이 있었지."
―황제라면 고종황제요?
"상감님 이름을 누가 입에 담어. 그냥 황제인 거지."
―아버님 존함은 기억하세요?
"그럼. 길 영(永)자에 석 삼(三)자를 쓰셨지. 언제고 상감님 옆에 계셨어. 한 달에 한 번 저기 정자(석파정)에도 상감님 모시고 출타하셨지. 키도 크시고 옷도 상감님 부럽지 않게 화려했어. 시방은 개차반이지. 아무리 돈들 가지고 산대도 옷 입은 거, 사는 거 보면 뒤죽박죽이야."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대궐서 주무시는 날이 많고, 집에 오시는 날짜는 따로 있었지. 오실 땐 대궐서 잡숫던 거 싸가지고 오셔서 우리가 호강을 했지. 명절이면 아버지가 상급으로 홍(紅)공단을 받아오셔서 설빔을 해 입고. 도톰하고 좋아서 (옷이) 꺾어지질 않었어."
―할머니는 어떤 아이였어요?
"옛날 어른들은 (딸들을) 마구 굴러먹는 선머슴처럼 기르지 않었거든. (여자가) 어딜 대문 밖을 나가고 그래. 밖을 내다보다가도 누가 삐끗하면 얼른 닫고 들어왔지. 지금은 막무가내야. 제멋대로들 살지."
―1919년 1월에 고종 임금이 돌아가셨지요.
"(내가) 열 살이나 됐겠지. 굉장했어. 서울 장안에 사람들이 다 모이고, 시골서도 구경오느라 길이 메이고. 국상이니까, 상감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양반들 줏대기가 꺾였으니 나라가 약해졌지. 그러다 빼앗겼지."
―3·1운동은 기억나세요?
"만세운동? 지금은 댈 것도 아니지. 사람들이 다 들고 나와서 정말 굉장했지. 무서웠지."
―6·25 전쟁도 기억나시죠?
"몰라. 시방 내가 100살이야. 그런 걸 다 기억하면 내가 늙은 게 아니게?"
―피란은 가셨을 거 아니에요?
"(한강)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못 갔지. 다행히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처신을 잘해서 큰 피해는 없었지. 중공군이 왔는데 그것들 매너가 괜찮아. 자기네 쌀 가지고 와서 밥을 좀 해달라고만 하지, 우리 것을 빼앗거나 하진 않었거든. 네 것은 네 것, 내 것은 내 것."
―대통령 하신 분들 중엔 누가 마음에 드셨어요?
"대통령? 내가 겪어봤어야 알지. 한자리에서 봤어야 좋다, 나쁘다 말을 하지. 바로 앞에서 말을 하다가도 빗나가는 게 사람인데, 멀리서 보고 그 사람을 어떻게 알어?"
■ 부부싸움? 그저 꼴딱 삼키고 잊어야지
―열아홉 살에 부암동 박씨 집안으로 시집가셨지요?
"아버님 대궐 친구 분이 중매해서 갔지. 우리 남편이 막내아들인데 내가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고 살았어."
―옛날엔 시집살이가 매웠다잖아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 부모에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니 요만큼도 거침이 없었어. 사람에겐 본밑이라는 게 있잖어. 거기가 내 본가라 여겼지. 힘든 줄도 모르고 살았어.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으면 어느 부모가 자식이랑 살어. 언제든 복이라는 게 있거든. 부모는 부모답게 대우를 해야 자식이 그 복을 받는 거지."
―서방님(박계동·1989년 작고)은 어떤 분이셨어요? 잘생기셨어요?
"남편? 하도 오래되어서 올상갈상하지. 숭악허게 생기진 않었어(웃음).나보다 아홉 살이나 많으셨지. (지금의 하림각 뒤에서) 과수원을 했어. 위로 두 시아주버님들이 살림을 홀랑 날려 먹어서 우린 맨손으로 시작했지. 요만한 그릇때기 하나가 없었어. 둘이서 만날 일만 했지. 앵두가 열리면 그걸 퍼가지고 와서 길바닥에서 팔고, 능금이 달리면 또 한 무더기 들고 나와 팔았지. 신용이 좋아 나중엔 남대문 시장까지 물건을 댔지. 우리 남편은 뭘 하나 잡으면 놓질 않었어."
―젊은 여자분이랑 바람도 한번 나셨다던데.
"몰라. 기억 안 나. 할아버지 때문에 내가 고생은 안 했어. 집안을 일으키려고 얼마나 지독하게 살었는지. 그 양반 쫓아갈 그림자도 없다고 동네 사람들 칭찬이 자자했어. 종당에는 기와집 짓고 잘살다 가셨지."
―부부싸움도 하셨을 것 아녜요?
"남자 하는 거 못마땅하고 비위에 거슬려도 꿀꺽 참고 살아야지. 꼴딱 삼키고 잊어야지. 싸움이 달래 나는 줄 알어? 마주쳐야 쌈을 하지. 부부간에 서로 비참한 말은 안 했어."
―할머니 음식 솜씨가 대단하셨다면서요. 민어찌개도 맛나게 끓이시고.
"옛날엔 지금처럼 음식이 맛없지 않았어. 물자를 많이 안 들여도 음식이 맛깔스러웠거든. 이만한 민어를 사 오면 호박 툭툭 잘라 넣고 고춧가루 풀어서 찌개를 끓였지. 예전엔 호박 하나만 넣어도 국물이 달착지근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 거름을 안 써서 그래. (채소가) 계절 없이 나와서 그래."
―나박김치도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단시간에 왁짝(급히) 익혀야지. 먹기 전날 담가서 이불을 덮어놨다가 다음날 확 벗겨서는 미나리 숭숭 썰어 새파랗게 먹어야 쨍하게 맛이 나지."
―만두 빚는 솜씨를 손녀딸에게 물려주신 거네요.
"만두는 혜경이 에미(며느리)가 잘했지. 그게 꾹꾹 (만두소를) 집어넣으면 되는 것 같아도 재주가 있어야 해. 덜렁덜렁 살림 못하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 뒷손 없고, 널브러뜨리고, 낭비하는 거."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세요?
"비빔밥은 안 먹어. 음식은 깔끔하고 정갈해야지."
■ 팔십? 그때 우리 할머닌 날아다녔지요
윤 할머니는 80세 넘어 처음 병원 문턱을 넘었다. 그것도 백내장 수술을 위해. "팔십에 난 달아 다녔지." 혜경씨에 따르면, 할머니는 보약은커녕 영양제 한 알 드시지 않았단다. 남자 못지않게 굵은 손목이 말해주듯, 할머니에겐 집안일, 농사일이 운동이었다. 요즘도 잣 고깔 따고, 앵두 씨를 빼고, 냅킨을 접는다. 지금도 중학생 증손자의 교복을 다리고, 혜경씨 해진 버선을 기우고, 당신 속옷을 손수 빨아 입으신다. 정 할 일이 없으면 불경을 읽는다. 혜경씨는 "100세가 넘도록 당신 자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지켜가는 모습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건강비결이 따로 있을까?
"소식하시고, 과일 좋아하시고, 잠 잘 주무시고. 일단 음식을 탐하시지 않는다. 과하고 지나친 정도를 기막히게 판단하신다."
―보약 같은 것도 드시나?
"팔순 넘어 손자들이 해 드렸지, 그전엔 영양제 한 알도 안 드셨다. 워낙 소박하게 사신 양반이다. 그릇 한죽(10개)씩 사서 모으는 욕심 외에는, 양장 한번 해 입는 일이 없고, 화장도 안 하셨다. 한복도 재봉틀로 손수 지어 입으시고, '구루무'도 끈적거려 싫다 하시고. 요즘엔 내가 인사동에서 한복을 해다 드리면 '곧 불구덩이 들어갈 텐데 옷은 왜 해오느냐'며 타박하신다."
―스트레스는? 어떤 할머니들은 욕으로 푸시지 않나.
"들어본 적 없다. 꼬장꼬장 잔소리는 하셔도.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신다. '번지 없는 주막'. 웃음도 '껄껄껄' 하고 웃으신다. 천생 여인인데, 대범하시다. 지금 이 집 얻을 때 동네 사람들이 여기서 누가 자살을 했다며 집터가 안 좋다고 하더라. 께름칙한데, 할머니가 '집터는 사람이 누르고 사는 거다, 그런 말에 기죽지 마라' 하시더라."
―전쟁은 피해 가셨지만, 할머니에게도 씻기지 않는 상처가 있지 않을까.
"큰딸과 막내아들, 며느리를 당신보다 앞세운 것. 할머니가 갈치 구운 걸 안 잡수신다. 갈치와 관련된 사고로 큰딸을 잃으신 것 같더라. 애써 잊고 싶으신지 여쭤봐도 대답 안 하신다. 아픈 기억은 훌훌 털고 좋았던 기억만 안고 가시려고 애를 쓰신다."
―할머니가 바쁘시다.
"외로울 겨를이 없으셨던 것, 그게 할머니의 진짜 장수 비결 아닌가 싶다. 어떤 손님은 할머니를 왜 식당에 나오게 하시느냐 묻는데, 들고나는 손님들과 인사하는 것, 직원들 형편까지 일일이 살피는 것, 거기서 에너지를 얻으신다. 직원들에게도 출근하면 할머니에게 가장 먼저 인사하고 정성껏 모시라고 부탁한다. 당신이 '필요한 사람,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해 드리는 거, 그게 자손들의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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